사적 제재의 쾌감을 어디까지 허용할까: 〈비질란테〉 웹툰과 드라마의 차이
사적 제재의 쾌감을 어디까지 허용할까: 〈비질란테〉 웹툰과 드라마의 차이
범죄자가 법망을 빠져나간다. 피해자는 고통받는데 가해자는 가벼운 처벌을 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 법 대신 그를 응징한다.
〈비질란테〉가 만들어내는 쾌감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법이 해결하지 못한 일을 주인공 김지용이 대신 해결한다는 대리 만족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더 흥미로운 질문은 ‘김지용의 행동이 통쾌한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의 폭력을 통쾌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면, 작품은 그 감정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요?
동명의 웹툰과 2023년 공개된 디즈니+ 드라마는 같은 인물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이 질문을 다루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드라마는 원작의 김지용에게서 일부 위험한 면을 덜어내고, 서로 다른 정의관을 가진 인물들의 충돌을 전면에 배치합니다.
※ 이하에는 웹툰과 드라마 〈비질란테〉의 설정 및 전개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질란테〉의 사적 제재가 통쾌하게 느껴지는 이유
김지용은 낮에는 경찰대 학생이고 밤에는 법망을 피한 범죄자를 직접 응징하는 ‘비질란테’입니다. 디즈니+ 역시 작품을 법을 피해 간 범죄자를 직접 심판하는 김지용의 이중생활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충돌을 다룬 액션 스릴러로 소개합니다.
이 설정에는 의도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김지용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교육받으면서 동시에 법의 절차를 믿지 않고 자신이 처벌의 기준을 정합니다. 공권력의 일부가 될 사람이 공권력의 한계를 누구보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부정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독자와 시청자는 두 감정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 ‘저런 범죄자는 더 강하게 처벌받아야 한다’는 분노
- ‘그래도 개인이 처벌할 권리는 없다’는 불안
- 법과 현실의 간극에 대한 답답함
- 김지용이 대신 응징할 때 발생하는 대리 만족
- 그 대리 만족을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편함
〈비질란테〉의 핵심은 이 가운데 하나를 정답으로 고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감정을 한꺼번에 발생시키는 것에 가깝습니다.
웹툰과 드라마의 결정적인 차이는 ‘김지용의 쾌감’에 있다
웹툰과 드라마의 차이를 단순히 삭제된 사건이나 변경된 캐릭터로만 비교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김지용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거리입니다.
비교 기준웹툰드라마
| 김지용의 폭력 | 인물의 위험성과 폭력의 쾌감을 비교적 강하게 드러냄 | 신념에 따른 행동이라는 측면을 더 강조 |
| 주인공의 불온함 | 독자가 김지용 자체를 경계하게 만드는 요소가 강함 | 원작보다 일부 완화됨 |
| 이야기의 중심 | 사적 제재와 그 파장이 폭넓게 확장됨 | 8부작에 맞춰 주요 인물의 신념 충돌을 압축 |
| 조헌의 역할 | 김지용과 대립하는 강력한 추적자 | ‘다른 정의’를 대표하는 축이 더욱 선명함 |
| 최미려의 위치 | 비질란테 현상을 이용하고 확산시키는 언론의 문제와 연결 | 경력 있는 기자로 변경되며 독자적인 관점이 강화됨 |
| 시청자가 받는 질문 | ‘김지용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 ‘누구의 정의가 옳은가’ |
이 차이는 제작진의 설명에서도 확인됩니다.
최정열 감독은 종영 후 인터뷰에서 원작에서는 김지용이 범죄자를 때리며 쾌감을 느끼는 부분이 비중 있게 묘사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의 신념을 강조했으며, 김지용의 ‘사이코패스 같은 면’을 다소 완화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주제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작지 않습니다.
웹툰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대상에는 ‘비질란테라는 현상’뿐 아니라 김지용 자신도 강하게 포함됩니다. 정의를 명분으로 폭력을 행사하지만, 그 폭력에서 개인적인 만족을 얻는 순간 그의 행동은 단순한 대리 처벌로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그 순간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는 정의를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일까요, 아니면 폭력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정의를 명분으로 삼는 것일까요?
두 가능성이 섞이면서 웹툰의 김지용은 훨씬 불편한 인물이 됩니다.
드라마는 왜 김지용의 위험성을 낮췄을까
드라마는 총 8부작입니다. 원작 웹툰의 방대한 이야기를 그대로 옮길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최정열 감독은 원작의 긴 이야기를 8부작으로 압축하기 위해 인상적인 사건들을 선택하고 전개의 속도와 긴장감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캐릭터들이 얽히면서 만들어지는 관계와 사건을 중요하게 다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압축 과정에서 드라마가 선택한 것은 김지용 개인의 심리적 위험성을 깊게 파고드는 것보다 여러 정의가 충돌하는 구조입니다.
김지용에게는 김지용의 정의가 있습니다.
조헌에게는 조헌의 정의가 있습니다.
최미려에게는 언론인으로서 비질란테 현상을 바라보고 활용하는 논리가 있고, 조강옥은 비질란테를 추종하면서 사적 제재가 개인의 행동을 넘어 하나의 문화와 모방으로 번질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김지용이 옳다/틀리다’라는 이분법보다 서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충돌할 때 무엇이 남는가입니다.
최 감독 역시 작품을 통해 법이 공정하게 작동하는지, 비질란테를 영웅과 악당 중 무엇으로 봐야 하는지, 더 나은 법적 시스템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질문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조헌이 있어야 비질란테의 ‘사이다’가 불편해진다
김지용만 놓고 보면 〈비질란테〉는 쉽게 복수극이 될 수 있습니다.
악인이 등장하고 법은 충분히 처벌하지 못합니다. 김지용이 찾아가 응징합니다. 시청자는 만족합니다. 다음 악인이 등장합니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사적 제재의 정당성을 고민하기보다 ‘이번에는 어떤 악인을 어떻게 혼내줄까’라는 처벌의 오락화로 흘러갈 위험이 있습니다.
조헌은 이 구조를 깨뜨립니다.
그 역시 범죄에 분노하고 정의를 추구합니다. 차이는 방법입니다. 김지용이 법의 실패를 이유로 법 바깥으로 나간다면 조헌은 불완전하더라도 제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래서 둘의 대립을 단순한 ‘경찰 대 범죄자’ 구도로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김지용이 “법이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내가 하겠다”고 말하는 인물이라면, 조헌은 “그 판단을 개인에게 넘기는 순간 더 큰 문제가 시작된다”고 맞서는 인물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사적 제재의 가장 어려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김지용이 처벌한 사람이 실제 악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방법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쁜 사람만 때리면 되잖아’가 위험한 이유
사적 제재를 다룬 작품을 볼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확실한 악인만 처벌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픽션에서는 가능합니다. 작가가 등장인물이 정말 악인인지 알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청자는 범죄 장면을 직접 보고,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 비질란테의 응징을 지켜봅니다.
현실에서는 이런 전지적 시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죄인인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증거가 신뢰할 만한지, 정당방위나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 판단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형사 절차가 답답할 정도로 복잡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처벌받아서는 안 될 사람을 처벌하는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사적 제재의 문제는 단순히 ‘범죄자를 불쌍하게 여겨야 하는가’가 아닙니다.
누가 범죄자를 결정할 권한을 가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확실한 악인을 응징하는 김지용에게 그 권한을 허락했다면, 내일은 누가 김지용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판정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통쾌한 복수’는 정치적·사회적 질문으로 바뀝니다.
최미려는 사적 제재가 ‘콘텐츠’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비질란테〉에서 빼놓기 어려운 인물이 기자 최미려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원작과 달리 최미려의 설정에도 변화가 있습니다. 배우 김소진은 드라마의 최미려가 원작의 신입 기자가 아니라 시행착오와 경험을 가진 기자로 설정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비질란테의 폭력이 김지용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비질란테를 보도합니다.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모방자가 나타납니다. 비질란테라는 이름 자체가 브랜드처럼 소비되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디즈니+의 공식 에피소드 소개에서도 3화부터 전국적인 모방 범죄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작품의 질문은 한 단계 확장됩니다.
사적 제재를 실행한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영웅 서사로 소비하는 사회에도 책임이 있을까요?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문유석 작가 역시 원작이 사적 제재의 장르적 쾌감뿐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방 범죄와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언론 같은 파생 문제까지 다룬다는 취지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최미려와 미디어의 존재는 주변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질란테 한 사람의 폭력이 어떻게 사회적 현상으로 증폭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웹툰은 더 위험한 김지용을, 드라마는 더 선명한 질문을 선택했다
어느 쪽이 더 깊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매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웹툰에서 김지용의 폭력적 쾌감이 강하게 드러날수록 독자는 주인공과 쉽게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악인을 응징하는 순간에는 김지용을 응원하다가도 그가 폭력 자체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 불안해집니다. 이 불편함은 작품의 중요한 힘입니다.
독자가 사적 제재를 지지하려는 순간, 작품 속 주인공의 위험성이 그 지지를 방해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드라마는 김지용의 그런 면을 완화하는 대신 인물마다 다른 정의관을 부각합니다.
그 결과 ‘김지용이라는 인간은 얼마나 위험한가’라는 질문은 조금 약해질 수 있지만, ‘법과 정의는 같은 것인가’, ‘불완전한 법을 개인이 대신할 수 있는가’, ‘사적 제재에 열광하는 사회는 무엇을 보여주는가’라는 주제는 더 빠르고 선명하게 전달됩니다.
이는 단순한 각색의 성공·실패보다 매체가 관객에게 어느 정도의 쾌감과 불편함을 배분했느냐의 차이로 보는 편이 흥미롭습니다.
사적 제재의 쾌감은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픽션에서 사적 제재를 묘사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는 현실의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과 피해자 보호의 부족, 처벌에 대한 대중의 감정을 드러내는 유용한 장르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쾌감을 제공하느냐가 아니라 쾌감 이후 무엇을 보여주느냐입니다.
범죄자를 두들겨 패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관객에게 남는 것은 응징의 만족일 가능성이 큽니다.
반대로 그 다음을 보여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모방자가 나타나고, 언론이 이를 상품화하고, 비질란테를 추종하는 사람이 생기며, 공권력은 흔들리고, ‘누가 악인인가’를 판단하는 권한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그때 관객은 자신이 조금 전 느낀 통쾌함까지 다시 검토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질란테〉가 던지는 질문은 ‘사적 제재에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보다 복잡합니다.
법의 실패에 분노하는 것과 개인에게 처벌권을 넘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이의 간격이 웹툰과 드라마 〈비질란테〉가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입니다.
결국 〈비질란테〉가 심판하는 것은 김지용만이 아니다
김지용은 분명 매력적인 다크 히어로입니다. 법이 충분히 해결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고, 시청자가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합니다.
그러나 〈비질란테〉를 단순한 ‘나쁜 놈 참교육’ 이야기로만 소비하면 작품의 절반밖에 보지 못합니다.
최정열 감독은 사적 복수의 끝이 통쾌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옳은지, 이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시대에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질문하는 드라마가 되기를 바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은 〈비질란테〉를 보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웹툰은 폭력에서 쾌감을 얻는 김지용의 위험성을 좀 더 가까이 보여주며 ‘당신이 응원하고 있는 이 사람을 정말 믿을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드라마는 그 위험성을 일부 덜어내는 대신 김지용·조헌·최미려·조강옥의 신념을 충돌시키며 ‘당신은 이들 가운데 누구의 정의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강화합니다.
그래서 사적 제재의 쾌감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질란테〉의 답은 명확한 찬성이나 반대가 아닙니다.
쾌감은 허용하되, 그 쾌감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순간까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악인을 응징하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끼는 것과 현실에서 한 개인에게 심판하고 처벌할 권한을 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비질란테〉가 흥미로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심판대에 올라가는 것은 범죄자와 김지용만이 아닙니다.
그의 주먹을 보며 통쾌해했던 독자와 시청자 역시 함께 심판대에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