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의 불륜은 어떻게 뱀파이어의 욕망이 되었나: 〈박쥐〉와 원작 〈테레즈 라캥〉
박찬욱 감독의 2009년 영화 **〈박쥐〉**는 흔히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고 소개됩니다. 그러나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단순한 시대·공간의 번안과는 거리가 멉니다.
1867년 프랑스 소설의 중심에는 권태로운 결혼, 불륜, 살인, 그리고 살인 이후 두 연인을 무너뜨리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반면 〈박쥐〉는 그 구조 위에 가톨릭 사제와 뱀파이어, 피에 대한 갈증, 육체적 쾌락, 구원과 죄라는 전혀 다른 장치를 얹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변화가 원작의 욕망을 지워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에 보이는 육체의 문제로 바꾼다는 점입니다.
〈테레즈 라캥〉에서 억눌린 욕망이 살인을 낳는다면, 〈박쥐〉에서는 욕망 자체가 피를 요구하는 신체가 됩니다.
※ 아래 내용에는 두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쥐〉는 〈테레즈 라캥〉을 그대로 영화화한 작품이 아니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은 1867년에 발표된 소설입니다.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자료에 따르면 작품은 처음 연재된 뒤 같은 해 단행본으로 출간됐으며,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갇힌 테레즈가 남편 카미유의 친구 로랑과 관계를 맺고 결국 남편을 살해한 뒤 파국으로 향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박쥐〉 역시 억압적인 가정에 갇힌 여성, 남편의 지인과 벌이는 불륜, 남편 살해, 살인 이후의 환영과 죄책감이라는 뼈대를 상당 부분 가져옵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 자신은 애초부터 두 작품을 하나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 이야기를 먼저 구상했고, 별도로 〈테레즈 라캥〉을 현대적으로 영화화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두 이야기를 합쳐보자는 제안이 나오면서 현재의 〈박쥐〉가 탄생했습니다.
당시 제작진도 영화와 소설의 관계를 일반적인 의미의 ‘원작’이라기보다 “inspired by”, 즉 영감을 받은 작품에 가깝게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박쥐〉를 이해하는 데 더 적절한 질문은 “원작을 얼마나 충실하게 옮겼는가”가 아닙니다.
“졸라가 인간의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구조를 박찬욱은 왜 뱀파이어 이야기 속으로 옮겼는가?”
여기에서 두 작품의 차이가 시작됩니다.
테레즈와 태주: 숨 막히는 집에서 욕망이 깨어난다
두 작품의 여성 인물은 출발점부터 매우 비슷합니다.
〈테레즈 라캥〉의 테레즈는 병약한 남편 카미유와 시어머니 라캥 부인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좁고 어두운 가게와 반복되는 일상은 그녀에게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던 중 카미유의 친구 로랑이 나타나면서 억눌려 있던 육체적 욕망이 폭발합니다.
〈박쥐〉의 태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태주는 남편 강우와 시어머니 라 여사가 지배하는 집에서 살아갑니다. 밤이면 몰래 거리로 나가 맨발로 달리는 태주의 모습은 단순한 기행이 아닙니다. 집 안에서 말과 행동을 통제당하는 사람이 자기 몸만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되찾으려는 행동처럼 보입니다.
한국영상자료원 계열의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는 〈박쥐〉를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받아 뱀파이어가 된 신부 상현이 억압된 삶에 지친 친구의 아내와 관계를 맺으며 인간성을 잃어가는 이야기로 소개합니다.
구조를 대응시키면 다음과 같습니다.
〈테레즈 라캥〉〈박쥐〉기능
| 테레즈 | 태주 | 결혼과 가정에 억눌린 여성 |
| 로랑 | 상현 | 남편의 지인이자 불륜 상대 |
| 카미유 | 강우 | 두 사람의 욕망을 막는 남편 |
| 라캥 부인 | 라 여사 | 가정을 지배하는 어머니 |
| 목요일 모임 | 마작 모임 | 폐쇄된 가족 공동체를 보여주는 장치 |
| 카미유 살해 | 강우 살해 | 욕망이 범죄로 넘어가는 전환점 |
| 죽은 카미유의 환영 | 죽은 강우의 환영 | 살인 후 죄책감의 시각화 |
박찬욱 감독은 인물과 사건을 상당 부분 옮기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를 바꿉니다.
로랑을 가톨릭 사제이자 뱀파이어인 상현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 변화 하나가 〈테레즈 라캥〉의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밀어냅니다.
로랑의 욕망은 선택이지만 상현의 갈증은 생존이다
〈테레즈 라캥〉의 로랑은 성직자도 아니고 특별히 도덕적인 인물도 아닙니다.
그에게 테레즈는 처음부터 숭고한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욕망의 대상에 가깝습니다. 가난하고 게으른 로랑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 하고, 테레즈와의 관계 역시 상당 부분 육체적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상현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남을 돕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은 가톨릭 사제입니다. 심지어 환자를 살리기 위한 의학 실험에 자원했다가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수혈을 받은 뒤 뱀파이어가 됩니다.
박찬욱은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주인공을 사제로 설정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사회에서 가장 이타적이고 인간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피를 마셔야 한다면 어떤 도덕적 딜레마가 생기는지에 관심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이 설정 때문에 〈박쥐〉에서 욕망의 성격은 둘로 갈라집니다.
- 피에 대한 욕망: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충족해야 합니다.
- 태주에 대한 욕망: 반드시 충족할 필요는 없지만 상현이 스스로 선택합니다.
바로 이 경계가 영화의 핵심입니다.
상현은 처음에는 가능한 한 남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피를 구하려 합니다. 자신이 아직 선한 인간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구분은 흐려집니다.
“살기 위해 피를 마신다”는 필요와 “원하기 때문에 태주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서로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현은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것을 합리화합니다.
박찬욱 감독 역시 상현을 자기합리화가 강한 인물로 설명했고, 그런 모습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캐릭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뱀파이어라는 설정은 단순한 공포영화 장치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어쩔 수 없는 필요’라고 바꾸어 부르는 과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불륜이 뱀파이어 이야기와 잘 맞는 이유
불륜과 흡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금지된 선을 넘는 행위이며, 한번 시작되면 더 강한 욕망을 낳습니다.
상현은 처음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피만 얻으려 합니다. 태주와의 관계도 처음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선을 한 번 넘기 시작하면 기준은 계속 이동합니다.
불륜은 살인으로 넘어가고, 피를 얻는 행위는 살육으로 변합니다.
이 때문에 〈박쥐〉에서 성욕과 식욕은 계속 겹쳐집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과 누군가의 몸을 탐한다는 것, 살아남기 위해 피를 마신다는 것과 쾌락을 위해 피를 마신다는 것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박찬욱 감독은 〈박쥐〉를 만들 때 관객의 오감을 자극하는 육체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졸라가 문장으로 분석했던 인간의 충동을 박찬욱은 피, 피부, 상처, 체액, 호흡, 소리로 바꾸어 보여준 셈입니다.
남편을 죽이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착각
두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불륜 자체보다 살인 이후에 있습니다.
테레즈와 로랑은 카미유만 사라지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현과 태주도 강우만 없어지면 자신들의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가 됩니다.
〈테레즈 라캥〉을 소개하는 프랑스국립도서관 자료 역시 두 연인이 남편을 살해하지만 그 범죄가 그들을 해방시키지 않고 오히려 죄책감과 공포 속에 묶어놓는 것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 졸라의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금지가 욕망을 만들었는데, 금지를 제거하자 욕망 자체도 망가집니다.
남몰래 만나야 할 때는 상대가 강렬하게 느껴졌지만, 남편이 죽고 두 사람이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게 되자 살인의 기억이 그들의 관계 사이로 들어옵니다.
〈박쥐〉도 같은 구조를 반복합니다.
강우를 제거한 뒤에도 상현과 태주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죽은 강우의 존재는 환영처럼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듭니다.
사랑의 장애물을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죽인 사람의 기억이 이전보다 더 강력한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태주는 테레즈에서 멈추지 않는다
여기까지라면 〈박쥐〉는 〈테레즈 라캥〉에 뱀파이어 설정만 추가한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서 태주는 원작의 테레즈와 크게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상현에게 뱀파이어의 능력을 받은 태주는 처음에는 놀라지만 곧 자신의 새로운 육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상현이 끊임없이 윤리적 기준을 만들고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자신을 설득한다면, 태주는 점차 그런 경계 자체에 관심을 잃습니다.
상현에게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은 죄책감의 문제입니다.
태주에게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은 오히려 해방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평생 타인의 통제 안에서 살아온 인물이 갑자기 압도적인 육체적 힘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의 두 사람은 같은 종족이면서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상현태주
| 욕망을 통제하려 함 | 욕망을 적극적으로 실행함 |
| 살인을 피하려 함 | 살인을 주저하지 않음 |
| 행동을 도덕적으로 합리화함 | 도덕적 정당화 자체에 관심이 적음 |
| 뱀파이어 상태를 저주처럼 받아들임 | 새로운 힘을 해방처럼 받아들임 |
이 차이는 〈박쥐〉를 단순한 죄책감의 이야기에서 욕망을 통제하려는 사람과 욕망 그 자체로 살아가려는 사람의 충돌로 확장합니다.
2009년 당시 평론에서도 영화가 원작의 테레즈와 달리 태주를 후반부에 상현을 넘어서는 존재로 변화시킨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로 지적됐습니다.
원작의 자연주의는 영화에서 ‘바이러스’가 된다
〈테레즈 라캥〉은 흔히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초기 작품으로 읽힙니다.
졸라는 인간을 이상적인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기보다 환경과 기질, 육체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 존재로 바라보았습니다.
테레즈와 로랑의 욕망 역시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라기보다 특정한 육체와 기질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에 가깝게 묘사됩니다. 현재 프랑스의 교육용 판본에서도 작품은 인간의 열정과 살인이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파국을 분석하는 자연주의 작품으로 설명됩니다.
〈박쥐〉는 이 자연주의적 발상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바꿉니다.
상현이 뱀파이어가 된 것은 저주나 악마와의 계약 때문이 아닙니다.
의학 실험, 바이러스 감염, 수혈이라는 생물학적 과정 때문입니다.
박찬욱 역시 기존 뱀파이어 영화에 등장하는 망토, 마늘, 십자가 같은 전형을 피하고 뱀파이어를 가능한 한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설정은 졸라와 묘하게 연결됩니다.
19세기 자연주의 소설이 인간의 행동을 기질과 환경으로 설명했다면, 21세기의 〈박쥐〉는 그것을 질병과 신체의 변화로 번역합니다.
상현이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의 몸은 피를 요구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몸이 욕망한다고 해서 인간은 어디까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영화는 바로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사제를 뱀파이어로 만든 순간 죄책감의 의미도 달라졌다
〈테레즈 라캥〉에서도 죄책감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심리적 압박입니다.
〈박쥐〉에서는 주인공이 가톨릭 사제이기 때문에 죄책감에 또 하나의 층위가 생깁니다.
상현에게 살인과 불륜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금지된 행동이 아닙니다.
자신이 평생 믿어온 윤리와 종교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행동입니다.
더구나 그는 뱀파이어가 되면서 기묘한 역설에 빠집니다.
남을 해치지 않는 사제로 살려면 자신이 죽어야 하고, 자신이 살려면 다른 사람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박쥐〉의 핵심 갈등은 선과 악처럼 단순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살기 위해 행하는 악은 어디까지 용서될 수 있는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은 사랑이 될 수 있는가.
욕망을 억제하려는 사람이 욕망에 충실한 사람보다 실제로 더 도덕적인가.
영화는 답을 선언하기보다 상현의 계속되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질문을 남깁니다.
〈박쥐〉라는 제목에 박쥐가 거의 필요하지 않은 이유
흥미롭게도 〈박쥐〉는 전통적인 뱀파이어 영화의 상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전형적인 뱀파이어 영화의 망토, 마늘, 십자가 등의 클리셰를 피하려 했다고 말했습니다. BFI 역시 이 영화가 박쥐나 말뚝, 마늘과 같은 전형적인 흡혈귀 도상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뱀파이어 상태를 일종의 질병처럼 다룬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인 ‘박쥐’는 특정 괴물을 가리킨다기보다 이중적인 삶의 상태에 더 가깝게 읽을 수 있습니다.
상현은 낮에는 숨어야 하고 밤에 활동합니다.
사제이면서 살인을 저지르고, 타인을 구하려 하면서 다른 사람의 피로 살아갑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상대를 소유하려 하고, 욕망을 부정하면서 누구보다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빛과 어둠 가운데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작품의 결말이 모두 ‘함께 죽는 것’으로 향하는 이유
〈테레즈 라캥〉에서 테레즈와 로랑의 관계는 결국 서로를 죽이려는 단계까지 갑니다.
한때 남편을 죽일 만큼 서로를 원했던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가 자신의 범죄를 기억하게 만드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의 대상이었던 상대가 곧 죄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박쥐〉도 결국 비슷한 지점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테레즈 라캥〉의 파국이 죄책감과 상호 증오가 만들어낸 몰락이라면, 〈박쥐〉의 마지막에서 상현은 처음으로 태주의 의사를 거슬러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며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상현이 영화 내내 자신의 욕망을 사랑과 생존이라는 말로 합리화했다면 마지막 행동에서는 그 모든 논리를 거꾸로 뒤집습니다.
자신도 살아남지 않겠다고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쥐〉의 마지막은 단순한 처벌로만 읽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살인자의 자살이면서, 사제의 속죄이고, 연인의 동반 죽음이며, 뱀파이어가 스스로 자신의 생존 본능을 거부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19세기 프랑스의 불륜이 뱀파이어가 된 까닭
〈박쥐〉가 〈테레즈 라캥〉에서 가져온 것은 줄거리만이 아닙니다.
두 작품이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구조는 이것입니다.
억압 → 욕망 → 금지 위반 → 살인 → 해방에 대한 기대 → 죄책감 → 파국
졸라는 이 과정을 19세기 파리의 어두운 상점과 답답한 결혼 생활 속에 배치했습니다.
박찬욱은 같은 구조를 현대 한국으로 옮기면서 그 위에 사제와 뱀파이어라는 두 개의 극단적인 존재를 겹쳤습니다.
사제는 욕망을 절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뱀파이어는 욕망을 충족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한 인간에게 이 두 정체성을 동시에 부여한 순간, 〈테레즈 라캥〉의 불륜 이야기는 〈박쥐〉의 뱀파이어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박쥐〉에서 피는 단순한 피가 아닙니다.
사랑일 수도 있고, 성욕일 수도 있으며, 생존 본능일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한다는 점에서는 폭력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두 작품을 함께 보면 〈박쥐〉의 뱀파이어 설정은 원작 위에 덧붙인 장르적 장식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에밀 졸라가 인간의 몸속에 숨어 있는 욕망을 해부했다면, 박찬욱은 그 욕망에 송곳니 대신 갈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는 질문은 뱀파이어가 실제로 존재하는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어디까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1867년의 〈테레즈 라캥〉과 2009년의 〈박쥐〉가 140년의 시간 차이를 넘어 만나는 지점입니다.